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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중독, 여행의 충동

여행, 가볍지 않는 묵직한 깨달음

by 재기방랑 2014. 5. 14.

여행을 한다는 것.

그저 좋은 풍경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평온하게 지내는 걸 여행이라고 정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그러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존재할 테고.

 

 

 그러나 여행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피어날 때가 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됐을까? 여기서 '잘 사는'이라는 의미는 단지 경제적인 부강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단 며칠만 지내도 '한번쯤 살아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 나라의 매력이 어디서 시작되는 걸까, 하는 부러움에 기인하는 고민.

 

혹은 어쩌다가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는 여행도 있다.

충분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명소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가난에 허덕이며,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것에 만족하게 되는 나라가 있다.

 

나에게는 남미 여행이 그 후자였다.

남미 6개국을 방문하면서 가장 좋았던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는 앙헬 폭포, 아차 폭포 등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유명한 나라다.

그러나 동시에 높은 살인률로 악명을 떨치는 나라다.

베네수엘라는 여러가지 수식어를 달고 있다.

'석유매장량 1위' 역시 베네수엘라의 다른 별명이다.

 

베네수엘라를 여행하는 동안, 내내 의문이었다.

이렇게 자원도 많고 땅도 넓고 남미에서는 가장 북쪽에 위치해 중미, 북미로 진출도 용이한데

이렇게까지 가난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한국을 떠나 남미 여행의 첫국가인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 도착했을 때

일행을 데리러 온 현지인이 카라카스는 너무 위험하다며 서둘러 카라카스를 벗어나기 위해

사정없이 액셀을 밟아대던 그 장면.

살인률이 1위에 달하는 카라카스, 그리고 자신의 나라로 여행을 온 외국인에게 첫마디를

'자신의 나라가 위험하니 얼른 벗어나자'라고 전하는 현지인.

 

지구 반을 돌아와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하는 얼굴에 피어나는 설렘이 어색할 정도로

서둘러 카라카스를 떠나자고 하는 가이드의 모습에 괜히 내가 머쓱해졌다.

그리고 카라카스를 떠나는 차 속에서 포착된 모습은 산 경사를 따라 오밀조밀 쌓아올린 빈민가.

 

사진으로만 보았던 극빈층의 삶을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베네수엘라에서 체류하는 일주일 내내 베네수엘라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카라카스에서는 지나가는 자동차도 세워서 털어가는 강도가 있다고 해서 일행들은 두려움에 떨며 숨소리도 죽인 채

차 속에서 눈알만 굴려댔다.

그런데 우리가 도착한 동네에는 베네수엘라의 베네치아가 있었다.

카라카스에서 보았던 빈민가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단독주택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으며

주택단지 앞에는 인공 하천이 흐르고 개인 요트가 정박되어 있는 모습.

 

눈으로 목격하는 빈부 격차보다 심한 건 온몸으로 체감하게 되는 일이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5분도 걷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호텔을 나서는 순간부터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택시가 없다면 절대 움직여선 안 되었다.

여행을 와서 무슨 그리 호들갑이냐 싶었는데,

정말 거리는 대낮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적막함이 흘렀다.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고,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벤치들도 몇 개 놓여져 있었지만

그 곳에도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쇼핑센터라고, 관광객이 몰리고, 경찰들이 감시하고 있는 지역은 대낮에, 현지 가이드를 동행한다는 조건하에 움직일 수 있었다.

우리 모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베네수엘라에서 느낀 분위기는 삭막함, 적막함,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앙헬폭포를 보러가는 투어에서도 첫날에는 학교도 가지 않고 생업에 뛰어든 아들과 아버지가 조종하는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꼬박 하루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다음 날, 우리는 경비행기를 타고 10분만에 하룻동안 지나온 강물 위를 날아갔다 왔다.

 

석유매장량 1위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던 건, 물값보다 싼 주유값을 볼 때뿐이었다.

내가 느낀 베네수엘라는 풍요로운 지하자원을 가진 축복을 받은 나라가 아니라 극심한 빈인빈 부익부 현상으로 치안 상태가 최악으로 치달은 나라다.

대책도 없이 그저 당한 사람이 억울한, 그런 나라였다.

 

소수의 기득권층이 독점해버린 지하자원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 소수가 아니라 가난에 허덕이는 대다수였다.

처참하게 살아가고, 굶어죽으나 죄짓고 끌려가 죽으나 어차피 죽을거 일단 주린 배나 채우고 보자, 라는 마음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대다수가 여행 내내 위험으로 따라다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남미에서도 베네수엘라는 여행 위험국가로 분류되어 오지여행자들 중에서도 베네수엘라 방문객은 정말 소수에 불과했다.

 

극심한 빈부격차가 가져다 주는 그 공포감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이론으로만 생각했던 위험보다 훨씬 더 두려운 일이었다.

남미를 여행하다보면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목격 뿐만이 아니라 체험을 하게 되는 순간도 생기고.

나만 잘 사는 나라가 아니라, 모두가 잘 사는 나라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찰하게 되고.​

 

여행이 주는 깨달음, 그 묵직한 울림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