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마카오 여행은 실로 급작스러웠고, 우연히 발생한 일이다. 애시당초 마카오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여행 일정을 짜고, 예산안을 수립하는 순차적인 계획에 의해 실행된 여행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건의 발단은 작년 2015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계절학기를 듣고 있던 중에, P로부터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그게 바로 이스트패커C 모집 공고였다.
P와 나의 사이는 교묘하고 애매하다.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이야기 하기엔 서로에게 흑역사일 뿐이니, 둘만의 이야기로 남겨두기로 하고. 무튼 정말 우리 둘은 나이도 다르고 사는 지역도 달랐다. 그러다가 P가 우리 동네로 이사오면서 나와 P가 같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가 되면서 우리 둘의 관계는 점점 돈독해졌다. 대학교에 올라가서는 둘다 해외여행에 꽂혀버려서는 매 방학마다 대륙을 넘나 들며 여행을 즐겼다. 매번 서로 같이 여행가자고 말해놓고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던 우리에게 이스트패커C 모집 공고는 마른 대지의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이스트패커C에 지원하기로 하고 지원서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목적지를 선정해야 했다. 근데 문제는 좀처럼 목적지를 선정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미 한 번 다녀온 여행지는 후보에서 제외할 것, 항공권이 저렴해야 할 것, 이 두 가지 조건에도 마땅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우리가 발견한 곳이 마카오였다. 마카오는 보통 홍콩을 여행하러 간 김에 하루 정도 당일치기로 방문하는 곳이지, 마카오를 주 목적지로 하여 여행하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에 신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서점에 가서 여행책자만 보더라도, 마카오는 홍콩 여행 책자의 곁다리일 뿐이니까. 항공권도 28만 원으로 만족스러운 가격이었다. 당장 1월에 출발해야 하는 일정에도 불구하고 저 가격이면 매우 매우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P는 2월에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나 역시 마지막 학기만을 남겨둔 상태라 모아둔 돈이라곤 없었다. 그래서 가능한 여행 지원금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했다. 사실 그렇게 계획안을 작성하는 것이 이 행사의 취지와 부합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15일 마감 기한을 맞춰 서류를 제출했다. PPT로 자유롭게 작성해서 보내면 됐는데, 워낙 지원자가 많다보니 우리가 지원한 이후에는 메일함이 꽉차서 수신이 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했다.
우리가 지원서에 썼던 내용을 돌이켜 보면 '선발기준' 중에서 '감동적인 사연', 혹은 '참신한 여행계획'이 서류 통과의 비결이 아니었나 추측한다. 우리의 독특한 인연에 대해 작성해서 썼는데 우리가 생각해도 우리는 보통 인연이 아니라서 그런 부분이 좀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에도 전략을 세웠던 것이 마카오는 단독 여행지로 각광받지 않으니 눈에 띄지 않을까 였기 때문에.
1차 서류 합격자 발표가 났을 땐 신기했다. PPT 템플릿을 꾸민 것도 아니고 정말 슬라이드에 우리 이야기만 넣어서 보냈기 때문에 좀 걱정을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자유형식'이다 보니 PPT를 잘 꾸민 것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에게 합격 연락이 와서 면접 날짜를 정했는데 면접은 3일에 걸쳐 진행이 되는데, 나는 사흘 째에 면접을 보기로 했다. 아마 제일 마지막 순서였던 것 같다.
서초에 위치한 본사에서 면접이 진행됐다. 면접을 보러 가면서도 최종 합격자에 비해 면접 대상자가 많아서 설령 되지 않더라도 자책하지 말자고 서로 위안했다. 총 6팀을 뽑는데, 서류합격자가 13팀이나 되니 2대1도 넘는 경쟁률이라면서. 서류 합격한 게 어디냐며 그렇게 자기 위로를 했다.
면접에 관해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마카오를 여행지로 선정한 것을 신기해 하셨다. 우리가 처음 목적지로 정할 때 생각했던 '여행지로서의 희소성/참신성'이 심사위원들에게도 통했던 듯했다. 수 많은 지원자 중에 마카오를 선정한 팀은 우리뿐이었다고도 하셨다. (뿌듯) 우리는 이스트패커C를 지원하면서 여행지를 선정했는데, 이미 개인적으로 여행을 미리 계획하고 후에 이스트패커C의 공고를 보고 지원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는 150만 원 지원금 안에서 갈 수 있는 곳을 찾다보니 마카오를 찾았다고 말씀드렸더니, 실제로 아시아 안의 국가를 선택한 지원자들로만 합격시켰다고 하셨다. 2인 이상 조를 이뤄 지원해야 하는데 150만 원의 지원금으로 유럽을 간다는 건 현실감이 없으니까.
면접이 진행되는 동안, 면접관이었던 이사님이 '이스트패커C 선정의 공정성'에 대해서 力說하셨다. 면접을 보러 가기 전에, 인터넷에서 다른 합격자들은 누굴까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다. 나야 지금이나 그때나 블로그를 열심히 하지 않고 있었지만 왠지 서류 합격자 중에 블로거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떤 블로거가 자신의 지원서가 접수되지 않았다면서 공정성을 의심하는 글을 게재했다. 요약하자면, 자신이 메일을 보냈는데 서류 합격이 발표날 때까지 메일을 읽지 않았단다. 그래서 문의했더니, 이스트팩에 메일이 수신되지 않았다고 답변이 왔다면서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냐', '이미 내정자가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밑에 달린 수 많은 댓글들까지. 음.. 솔직히 저렇게까지 썼어야 했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실제로 서류가 제대로 접수되었는지 문의하는 글이 이스트팩 사이트에 엄청 올라왔고, 이스트팩에서 지원자들의 메일계정을 검색해서 수신되지 않은 메일은 다시 보내달라고 해서 재지원 받기도 했는데, 그런 노력에 대한 언급은 없고 자신이 받은 부당함에 대해서만 글을 썼더라. (사실 그게 부당한지도 잘 모르겠다.) 우리 입장에서는 합격해서 여행을 가게 되면 감사한 일인 거고, 설령 안 되더라도 원래 처음부터 여행을 가려고 계획한 게 아니었으니 아쉽지만 손해는 아닌 거고. 만일 반대로 원래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면, 선정 여부와 관계없이 여행을 가면 되는 거 아닌가? 무튼 나는 그런 생각이었는데, 면접관들을 굉장히 신경이 쓰였나보다. 어쩌면 하나의 가설인데 이걸 아니라고 증명할 길이 없으니 이스트팩 회사 측도 답답했을 거다. 면접을 보러 온 지원자들이 정말 내정자가 있고 면접은 형식적인 걸까? 라고 생각할까봐 걱정하시는 것 같았다. 설령 불합격이더라도 그런 의혹은 갖지 않길 바란다고 신신당부하셨다. 사실 150만 원을 지원해주는 이벤트에서 내정자가 있다고 의심한다는 게 의아했다. 진짜 내정자가 있고, 모양새만 면접이었다면 뭐하러 6팀에게 150만 원씩 주겠나, 그냥 한 팀만 선정해서 900만 원을 주고 말지. 이것 저것 논리를 따지고 보면 내정자에 대한 의혹은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게 느껴졌기에 크게 동요하진 않았는데, 면접관 입장에서는 억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하튼 그 날은 면접을 보고 근처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으며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대망의 최종 합격자 발표일! P가들어본 적 없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합격했다고 이야기 했다. 얼떨덜했다. 될 거라는 확신도 없었고, 감도 안 와서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선정되었다고 하니. 12월 24일에 발표가 났는데, 괜히 크리스마스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2016년 첫 달부터 계획도 없던 마카오에 여행을 가게 되었다. 마카오, 해외여행 그 어느 것도 기대하지 못했기에 더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150만 원의 지원금을 알차게 다 쓰고, 각자 20만 원씩만 환전해서 쓰고 왔다. 20만 원으로 마카오를 여행한 셈이다.
많이 늦은 글이지만, 이스트팩 덕분에 죽마고우와 오랜 버킷리스트를 달성했다. 이 글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